"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상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상을 파괴해야 한다."
-헤르만 헤세 데미안
"침대는 세상이다. 이불 밖 세상은 위험하다"
-침대 위 이상몽상
눈을 뜨고 또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저녁 9:30
5분을 부르짖는 몸뚱이를 일으켜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일어나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종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는다.
가는 시간 동안 피곤한 몸은 좀 더 자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 번 일어난 몸은 퀭한 눈을 감지 못하고 뜬 눈으로 40분을 보낸다.
금요일의 종로는 토요일을 앞둔 직장인들로 근처 학원을 마친 학생들로 여기저기 북적이고,
내가 일 하는 맥도날드도 그렇게 다를 건 없다.
나는 맥도날드 새벽 알바다.
술 먹고 진상이 많기로 유명한 종로 1가부터 종각역까지 시원하게 뻗은 대로 한켠에 있는 5층 규모의 맥도날드의 유일한 새벽 알바생.
같이 일 하시는 어머님은 무릎이 아파 버거를 만들고 설거지만 하시고, 매니저는 페이퍼 워크를 한다고 사무실에 박혀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처음에야 혼자 하는 일이 좀 많다고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만 둘 이유 중 하나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아침 07:00
새벽일을 마치고 아직 열지 않는 4층의 한켠 소파에서 쪽잠을 청한다.
40분,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다.
그렇게 조금이나마 회복한 체력은 다음 알바를 쳐내기 위해 아껴둬야 한다.
10분 거리를 걸어 도착한 파스쿠찌.
직원이 나를 향해 나름 밝게 인사한다.
둘 다 잠이 덜 깬 건 마찬가지 인지 퉁퉁 부은 얼굴이 서로 우습기만 하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는 물품을 정리하고 청소를 시작한다.
이 카페에서도 어느새 1년이 넘게 일을 하고 있다.
나이가 가장 많아서 그런지 가장 오래 일해서 그런지 직원 알바 가리지 않고 나를 의지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었다.
나쁘지는 않았었는데, 최근 사장이 바뀌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가장 오래 일한 알바.
안타깝지만 오래 일 했지만 알바라는 직책은 매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사장이 쳐내기 참 좋은 본보기다.
나름 오래 일하면서 정든 곳에서 희생양이라는 모습으로 기억되며 떠나기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일을 하다 보니 또 어느새 하루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
오후 03:30
집에 도착해서 씻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앞으로 또 뭘 해야 하나.
처음부터 알바인생을 산 건 아니었다.
번듯한 직장은 없어도 어렸을 적 꿈인 요리사를 좇은 적도 있다.
군대도 취사병을 나왔고 생각보다 주방일에 소질도 있었다.
빠른 일처리와 생각보다 괜찮은 임기응변.
말귀도 꽤나 잘 알아듣는 편이어서 어딜 가나 환영받는 사람이었다.
재미없고 비싸기만 한 대학 공부보다는 일 터에서 배우는 게 더 많아 보인 것도 사실이고.
지방 전문대라는 곳에서 교수라는 사람이 정부 정책에 대해서 찬양하며 정치색을 띄는 것에 환멸도 느끼고
어디서부터 잘 못 되었는지 내가 속한 그룹만 압박하며 청소를 시키는 조교에게도 역겨움을 느꼈다.
아버지가 친척에게 돈을 빌려가며 낸 400만 원이라는 등록금을 학교에 내고서는 하는 게
가끔 쥐는 칼, 가끔 만드는 요리, 앉아서 듣는 정치 강의, 신경질 내며 주방 청소하라는 조교의 히스테리.
2학기부터는 말도 없이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기말고사는 당연히 그냥 넘겨버렸고.
교수의 전화를 받고는 군 휴학을 할 거라며 말을 했지만 그 휴학계조차 내려가는 게 싫어
그렇게 어영부영 제적처리가 되어 고졸이 되었고 군대를 갔다.
부모님은 노발대발 난리가 났다.
큰 아들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지방 전문대도 모자라 그것도 자퇴를 했으니.
그래도 일을 하며 돈을 벌며 요리사가 되겠노라.
학교에서 큰돈 쓰며 어영부영 시간을 쓰기 싫다며 그렇게 취직을 하고 군대를 가고 다시 취직을 했다.
난 실력이 없었나 보다.
열심히 하고 빠르게 적응하는 내 모습에 사람들의 기대는 점점 거대해져 갔고
그 기대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내 위에 떨어져 나를 짓눌렀다.
주 6일 13시간 한 달 150만 원.
어딜 가던 어르고 잘한다 하던 사람들이 점점 호통치고 답답해하고,
눈가리개를 한 채 불붙은 말처럼 뛰는 내게 돌아오는 건 당근 대신 더 빨리 달리라는 채찍뿐이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뭉개져가며 현장에서 배울 수 있었던 건
선배들이 선심 쓰듯 던져주는 몇 가지와 그들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산다는 하루살이의 마음가짐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했다면 조금은 더 괜찮은 환경에서 요리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아무 의미 없다 생각했던 곳은 내가 찾지 않아 의미가 없었던 게 아닌가?
알량한 경력과 별다른 기술 없이 고졸인 내 앞에 남은 건 몇 푼 안 되는 돈과
주방에 대한 환멸 미래에 대한 불안 고민뿐.
똑같이 힘들 바에야 조금 덜 스트레스받고 덜 힘들고 조금이라도 더 돈을 받겠다 생각을 하며
미래에 대한 기대도 꿈도 없이 고통받지 않으려는 알바 인생이 시작되었고
1년이 지난 지금 그 알바인생의 막바지에 서 있다.
알바 인생 1년
남은 건 천만 원이라는 돈과 25살을 앞둔 나이.
나이를 먹어가면 먹어 갈수록 저렴한 가격에 내 시간을 파는 것이 아까워져 갔지만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나라는 가치를 업그레이드 하기에는 어떠한 확신도 관심도 없었다.
이대론 안 되는 걸 잘 알지만, 그렇다고 뭘 해야 하는 거지
걱정과 고민, 불확실한 미래에 내가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거라고는 돈 밖에는 없었다.
실속 없이 비싸기만 한 학벌, 배운 것 없이 부려 먹히던 경력에 비해 돈은 공평했으니까.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그동안 요식업에서 일해왔던 나에게 이제 와서 다른 일을 하는 나의 모습을 쉽게 떠올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고,
그런 확신 없는 상태에서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며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모습은
등록금을 빚지던 아버지의 모습에 덧씌워져 더 나를 옭아매었다.
어렸을 적 나름 커졌던 꿈은 점점 깨지고 깎여가며 작아져 결국 남은 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작은 바람은,
지방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1억 가량하는 아파트에 500만 원 정도 하는 중고차 하나.
월에 120 정도 받을 수 있는 직장에 다니며 겨우겨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나 하나 먹고살자는.
비참하고 차가울 정도로 현실적이 되어갔다.
장사라도 해볼까?
지금이라도 어디 조그마한 이자카야에서 몇 가지 안주 만드는 걸 배우고 영업하는 걸 눈 여겨보면 3년 후에는
빚을 조금 내서 내 가게를 할 수 있을 거다.
그러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그렇다고 고생하기는 싫다. 일주일에 70시간 일하며 150만 원 받는 생활은 이제 지겨워졌다.
200만 원을 받는다고 더 좋은 것도 아니었고.
한국에서 고졸로 별 다른 경력도 부유하지도 않는 내게 돈을 번다는 건 참 고통스럽고 우울하며
하루하루 나라는 사람을 자존감 미래 기대 희망을 팔아가며 겨우 몇 푼 쥔다는 것이었으니까.
자영업 중 70%가 1년 안에 망하고 그중 50%가 5년 안에 망한다는 기사는 우울함을 떠올리게 하지만
그런 말에 더 움츠러들기엔 나는 절박했고 더 이상 이 희망마저 꺾어가며 그려갈 어떠한 미래도 없게 되었다.
그럼 기왕 나의 시간을 팔아 돈을 벌 거 내 상황에서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나에 앞에 호주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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